엄마와 딸, 끊어지지 않는 실타래
다 자란 금쪽이와 늙은 금쪽이
방금 썼던 글이 날아가 버렸다. 가슴 아픈 이야기의 실타래를 구불구불 풀어놓았건만, 너무 허탈하다. 글이라는 건 쓰려고만 해서 써지는 건 아니다. 무언가 ‘써야 한다’는 강박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.
글을 쓸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, 어느 날은 바람 부는 날 연 실타래처럼 술술 풀리고, 또 어떤 날은 실이 엉켜버린 듯 빡빡하게만 느껴진다. 오늘 사라져버린 글의 내용은 어쩌면 다시 쓸 수 있을지 모르다. 그러나 여전히 내 안에서 풀리지 않은 문제, 바로 딸과의 앙숙 같은 관계는 남아 있다.
‘딸과 엄마’는 어떤 관계일까. 문득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해본다.
한때 육아 커뮤니티에서는 ‘~이고 싶은 7살’이라는 말이 유행했다.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 성장이 빨라져서 그 나이도 5살로 하향 조정되었다고 한다. 요즘 아이들의 대표 문제아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‘금쪽이’가 버젓이 쓰일 정도이니, ‘미운 5살’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만하다.
하지만 생각해 보면, 아이는 아이대로, 어른은 어른대로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. 아이의 문제 행동을 교정해주지 않으면, 자라서 그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적 비용이 되어 되돌아온다. 아이에게도, 부모에게도, 그리고 결국 이웃과 사회, 국가에까지 부담을 준다.
이곳, 미국에 와서 알게 된 것 중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‘사설 교도소’가 있다는 사실이다. 그리고 그 교도소가 외곽이 아닌 도심 한복판에 있다는 것도. 서울 도심에 교도소가 있다고 상상이나 해봤을까?
더 놀라운 것은, 돈을 내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수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. 교도소가 기업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. 결국 교도소의 목적은 수감자를 일반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다. 하지만 그 격리의 비용은 국가와 사회에 큰 부담이다.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건, 수감자 개개인의 능력이 사회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사장되고 있다는 점이다.
딸과 나의 문제에서 멀리 온 것 같지만, 사실 맥락은 같다.
지속되는 냉전, 반복되는 충돌. 감정은 이미 침체되었고, 그 안은 썩은 물같다. 웃음도 없고, 활기도 없으며, 감사함도 없다. 삶의 의욕은 말할 것도 없다. 그런 무거운 기운이 돌고 도니, 악순환은 끝날 줄을 모른다. 사소한 말에도 불꽃이 튄다.
이 감정의 부딪힘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. 몇 년 전부터 계속되어 왔고,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. 이제는 ‘다 자란 금쪽이’와 ‘늙은 금쪽이’가 대치하는 형국이다. 끝없이 반복되는 감정의 소모 속에서 남는 것은 ‘경화된 마음’과 ‘서로에 대한 무관심’뿐이다.